검색

민중신학에 관하여

근본주의보다 인지도가 낮았다

가 -가 +

공헌배
기사입력 2020-12-21

 

필자는 한 때 안병무 박사의 책을 읽으며 심취하기도 했고, 민중신학을 주제로 논문도 써 봤다.

 

혹자는 나에게 말하길: 공헌배는 근본주의자다라는 이상한 주장을 했다. 글쎄!

 

내가 근본주의자일까? 다른 한편에서는 내가 대단한 진보주의자인 것처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민중신학은 소위 그 근본주의 신학에 비할 때 조족지혈 수준 정도다. 다시 말해 한국사회의 특수성에서 보면 민중신학은 근본주의 신학한테 게임 안 됐다!

 

물론 민중신학이 산업화 시대의 부작용 때문에 드러난 곁가지 일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성이나 사회적 특수성 그리고 한국사회에서의 보편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민중신학은 곁가지 내지 신학적 지식인들의 사유들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여기서 등장할 수 있는 사유가 있는데 이성적 신학 내지 소위 글솜씨 또는 책을 읽었을 때의 설득력 등이다. 개인적으로 볼 때 안병무나 함석헌 등은 글솜씨가 좋다. 책을 읽으면 뭔가 빨려 들어가도록 만드는 심미적 특성도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 집회는 전도동력세미나 또는 알파 컨퍼런스와 같은 모임이었지, 안병무 세미나는 좀 덜 대중적인 듯 여겨졌다.

 

이게 왜 이럴까?

 

더러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쳐서 그렇다는 둥, 대중이 계몽이 되지 않아 그렇다는 둥 한다면 그런 사람은 그다지 깊게 연구하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 말이 있고, 조선 건국이 있다. 조선건국의 주역 중 한 명이 삼봉 정도전인데, 그 사람의 문집을 보면 글솜씨가 뛰어나다.

 

삼봉 정도전은 철학을 잘 한 사람과 같다. 조선은 인문학 시험 내지 글솜씨로 공무원(관직)을 뽑던 사회였다. 쉽게 말하면; 중국 고전 익히기가 공무원 등용의 주요 관문이었던 사회였다.

 

이 패러다임은 조선 말에 완벽할 정도로 무너졌다. 물론 글쓰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조선 시대가 무너지면서 등장한 너무도 큰 역사의 변혁이 있었는데, 이를 간과 할 수 없다.

 

한국 개신교회는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이성적 판단이나 지식인들이 세운 나라로 친다면 이씨 조선도 제법이다. 그러나 그 지식인들에게 무슨 문제들이 있었는지 깊게 살펴야 한다! 꽤나 큰 문제들이 있었다. 이걸 여기서 다 다룰 수는 없다.

 

하나 만 예를 들면, 고려는 약 80년 정도 몽고의 지배를 받은 셈인데, 반성역사관(反省歷史觀)을 갖지 못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유대민족은 바빌론 포로기 70여 년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역사를 돌아 본 반성의 기회를 가졌는데 고려는 유다와 같은 반성을 못한 듯했다(이에 대해서는 설교: 예언자 예레미야와 비교).

 

일제 강점기에 들면서 한반도는 산업화로 접어들었다.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은 분단 이후 더 강한 산업사회로 진입했다. 여기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은 서구에서도 나타났다. 이름하여 노동문제, 도시 빈민 문제, 빈부의 격차, 이농 현상 등. 우리가 많이 듣던 문제들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기서 민중신학의 등장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 까지나 민중신학은 한국교계의 큰 흐름에서 볼 때, 산업화 시대의 곁가지 정도였다.

 

그럼 한국 교계의 주 흐름은 무엇이었을까? 다름 아닌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의 전도활동이었다.

 

더러 여기에 이성적 판단이나 신학적 사유 등을 대입하기도 한다. 주로 신학자들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게 무슨 소용일까?

 

과연 조선 말의 민중이 이성이 없어서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줄 섰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민중도 이익이 무엇인지 정도는 잘 안다. 그들은 생존에 치열한 사람들이다. 왜 기독교 교회를 택했으며,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줄 서야 했는지를 분석하지 못하고 신학적 사유나 서양신학의 그 어떤 흐름에 견주어 한국의 교계를 비판 만 해댄다면 그 사람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엉뚱한 사람이 되고 만다.

 

조선 말은 개벽(開闢)의 시대였다. 이를 간과 한 채 섣불리 판단한다면 그 판단은 신뢰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활동할 당시의 사태를 좀 더 면밀하게 연구해야 한다. 이를테면 사회의 상황, 정치적 사태, 그 당시 세계사의 흐름, 역사적 인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대사로부터의 요청 내지 고대사 해석 등.

 

글솜씨 좋은 민중신학자들의 심미적 선동보다는 실질적 삶의 문제에 부딪혀야 하는 민중과 직접 만났던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의 헌신이 더 와 닿는 모양이다.

 

시대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벽(開闢)의 시대에 그 삶의 절박한 사태들을 생각할 때 초기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민중에게 꽤나 매력 있었던 것 같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band naver URL복사

많이 본 뉴스


    Warning: simplexml_load_file(): http://www.pcki.kr/rss/rss_m_topnews_utf8.php:1: parser error : Document is empty in /home/ins_news3/ins_mobile/data/ins_skin/n/news_view.php on line 164

    Warning: Invalid argument supplied for foreach() in /home/ins_news3/ins_mobile/data/ins_skin/n/news_view.php on line 166

최신기사


    Warning: Invalid argument supplied for foreach() in /home/ins_news3/ins_mobile/data/ins_skin/n/news_view.php on line 191
URL 복사
x

PC버전 맨위로 갱신

Copyright ⓒ 경건과 학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