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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토기의 특성은 무엇일까?

연(燕)나라나 중국 토기와의 연관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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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헌배
기사입력 2020-10-08

 

한국 고고학계에 스타 교수님이 계신다.

 

그분은 영남대에 재직 중인 정00 교수님이신데, 도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으며, 낙랑 토기 연구에 있어서 권위자이시다!

 

그분의 연구실적물을 말씀드릴 것 같으면; 2007~2018까지 대략 60편이다. 평균 내면 일 년에 5편 이상 쓰셨다는 결론이다. 실로 엄청난 연구 편수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논문, 단행본, 공저, 학회에서의 논문 발표 등 모두 합해서 그렇다.

 

00 교수가 등장하기 전의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당연히 한반도의 낙랑 토기 수혜설이 대세였다. , 한반도 토기문화에 획기적 영향을 준 토기가 낙랑 식 토기라는 뜻이다.

 

그러나 낙랑은 약 400년 동안 평양의 대동강 남쪽에 있던 중국의 위성도시(식민지)였다. 다시 말해 고조선이 B.C. 108년 경에 한()나라에게 망하여, 군현들을 설치했는데, 그 중 가장 오랫동안 중국의 위성도시로 남아 있던 곳이 낙랑이라는 학설이다.

 

그런데 바로 그 낙랑의 문화들이 한반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오랫동안 알려져 왔던 통설이었다.

 

그러나 정00 교수는 이 학설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를테면 낙랑 토기 이전에 이미 고조선과의 교류가 있었고, 그 증거는 영남 지역의 토기에서 나타났다, 고조선의 왕검성(수도)은 평양이 아니다.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동 쪽으로 여긴다, 월남의 예를 들면, ()나라가 월남을 지배했더라도 그 지역의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대거 이주시켜 통치한 사례가 있다. 이와 비슷하게 고조선의 군현도 그 수도에서 주민들을 옮겨,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평양의 낙랑군은 고조선의 왕검성이 아니다, 이병도 선생의 학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등.

 

획기적 학설들이 쏟아진 셈이다. 특히 도쿄대의 수장고에서 일제 시대 때 가져 갔던 수백점의 낙랑 토기들을 직접 관찰하고 연구한 놀라운 학자일 뿐만 아니라 직접 평양을 방문하여 낙랑 유적지구들을 탐방한 독보적 학자였던 셈이다.

 

그 분의 논문 중 하나를 소개하면: “연식토기문화의 확산과 후기 고조선의 토기문화” <백산학보> 100, (2014, 12)이다.

 

이 논문에서의 주장 몇 가지를 살피면: 요하를 기준으로 할 때 토기문화가 요동지역과 요서지역과의 뚜렷한 차이가 드러난다. 세죽리-연화보로 대표 되는 토기문화는 연()나라의 토기문화가 아니라 후기 고조선의 토기문화다. 더 이상 미송리 형 토기가 고조선 토기를 대표하는 분위기에서 탈피해야 한다. 고조선의 토기문화는 중국 토기의 영향이 상존하는데, 중국 물질문화의 영향이 전혀 인지되지 않는 공간에서 고조선과 그 문화를 찾으려는 접근 방법에서 벗어나야 고조선이 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낼 것이다.

 

조금 비교하여 볼 점은 AMS(연대측정)이다. 현대에는 과거와는 달리 연대 측정기술이 엄청 발달했다. 그래서 좀 놀라운 현상이 관찰됐다. 평양 쪽 물질문화의 편년이 B.C. 108년 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버렸다. , 몇 백년 차이가 난다.

 

쉽게 말하면, ()나라로부터의 낙랑군 설치를 고조선 멸망 연대인 B.C. 108년으로 잡을 수 있고, 이에 연관하여 한()군현의 설치를 B.C. 108년 이후로 설정해야 할 텐데, 실질적인 평양의 물질문화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 된 것으로 연대측정 결과가 나왔다.

 

물론 모 교수는 기록물과 탄소연대 측정을 동일 비교의 요소로 보면 안 되고, 자연과학을 이용한 연대측정을 맹목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저 연대측정의 결과 때문에 고대 평양의 문화 영향력에 대한 특이한 가설까지 생기게 되는 데, 예를 들면 일본의 나카무라 다이스케는 낙랑이 아니라 이미 그보다 훨씬 이전에 평양지역이 연()나라의 영향권에 들었을 것으로 주장한 것이다. , 고조선 패싱 이론이다. 일본식으로 표현하면 고조선 쓰미마셍이다.

 

물론 이에 대해 정00 교수는 분노했다. 정 교수의 성질을 알았는지 나카무라 다이스케도 정00 앞에서는 조금 조심했던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렇다면 그 고조선에 대한 조선시대의 이해는 무엇인가?

 

기자조선설에 단군 조선설이다. 물론 단군왕검에 대해 실증사학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신화이다!

 

실증사학에서는 고조선의 기원을 많이 거슬러 올라가 잡아도 대략 B.C. 7세기 경으로 본다.

 

여기서 신학적으로 검토할 일이 있을 듯 한데, 반성역사관(反省歷史觀)이다. 이는 성경에 견준 좀 엉뚱한 역사관인데, 필자가 학회에서도 주장했던 것이다.

 

객관적 고조선이 설령 중국 문화와의 연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 과거에 출()중국 했던 기억들을 되짚어 오늘날에 반성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실지로 위만의 무리가 출 중국 했던 일이나 진한(秦漢)의 무리들이 출 중국 했던 기록들에 의거하여, 출애굽 신학의 특성들을 재해석 할 필요성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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