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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좀 더 다양하게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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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헌배
기사입력 2020-06-17

 

아래는 유엠 부찐/ 이항재·이병두 옮김 <고조선 유적·유물> (서울: 소나무, 1993), 55-93쪽 중, 일부를 소개하고 핵심 내용의 일부를 옮긴 것이다.

 

예맥족(濊貊族)에 대한 지나(China)학계와 일본 학계의 이견이다.

 

예맥의 인종 및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설이 있는데, 크게 지나 기원설과 비()지나 기원설의 두 계열로 구분된다. ()지나 기원설은 다시 예맥의 기원이 고아시아 족, 퉁구스-만주족 및 몽고족이라는 설로 묶을 수 있다.... 고조선의 퉁구스-만주족 기원설은 일본 학자들이 주로 지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시라토리 고기찌는 퉁구스 족이 고대 한민족의 토대를 이룬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주로 고대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를 분석하여 그러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지나 역사가들은 같은 자료를 분석하면서도 예맥이 지나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가설은 슈이 이푸의 연구 논문인 "고대 한민족 개관"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한국 학자 가운데 상당수가 형태는 다르지만 이 이론을 지지하고 있다. 린회이시양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날까지 예족은 당시 지나민족 가운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지나 민족의 일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인종상으로 매우 가까왔고 역사적으로도 지나 민족의 일부였다. 왜냐하면 지나문화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인종 관계로 볼 때 예족은 지나의 이주민과 상당 부분 혼합되었다.”

 

그러나 S. M. 시르꼬로프는 <북퉁구스족들의 사회조직>(도꾜: 1956), 352에서 고대 한민족과 그들의 선조인 예맥족이 고아시아(보통은 고조선 족으로 여김)족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설은 널리 퍼져 있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공부한 유 엠 부찐은 맥족은 이미 상당수가 지나 종족과 섞이었다고 했다. 유 엠 부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쪽의 맥()은 다른 동이족처럼 중국인으로 동화되었으며, 주로 부여의 영토에 거주한 예족(濊族)의 일부는 만저우(滿洲)족에 속하게 되었다(93).

 

요약하면; 예맥족(濊貊族) , 맥족은 중국인들과 혼혈 화 되었고, 그나마 예족은 부여족과 뭐라도 닮은 듯이 북방 퉁구스(?) 계열의 인종으로 남아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예족이나 부여족의 문화적 정체성마저도 북방 퉁구스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럼 고구려를 구성했던 인종에 대해 알아보자:

 

그 나라 사람들은 육체의 힘이 세고 전투에 능하다. 옥저와 동예는 그들에게 종속되었다. 그리고 (이 나라에는) 소수맥()이 있다. ()구려는 나라를 세우고 큰 강 연안에 거주하였다. 그들(고구려인들)의 특정한 인맥을 성립시켰던 맥인들은 시안핑 현(西安平縣)의 북쪽을 지나 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조그만 강을 따라 나라를 세웠다. 이 때문에 그들은 소수맥(小水貊)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기에서는 소위 맥궁으로 불리는 좋은 활이 나온다(<三國志> 30, ‘高句麗傳’).

 

구려(句驪)는 일명 맥이(貊耳)로 불린다. 그들 중에는 조그만 강가에 사는 종족이 있다. 그들은 소수맥(小水貊)으로 불린다(<後漢書> 85, ‘東夷列傳’ <句麗>).

 

그러니까 고구려를 세운 인종들은 맥족(貊族)이라는 뜻이 된다. 물론 고구려 왕 주몽은 부여로부터 나왔고, ‘고구려라는 국가사회는 예족이나 부여족 등이 포함되었을 다인종(多人種)사회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세력은 맥족인 모양이다.

 

그런데 그 맥족이 중국 계의 혼혈이란다. 그럼 종족 계통과 관계 된 다른 기록을 보자: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夫餘)사람들과 비슷하지만 언어는 각기 다르다(<後漢書> 85, ‘東夷列傳’ <挹婁傳>).

 

, 부여족과 읍루(挹婁), 그러니까 숙신족은 형질상 부여족과 닮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여와 읍루(숙신)는 그 언어가 다르다고 했다. 그러니까 숙신족과 부여족은 문화적 정체에 있어서 이질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쨌던 인종상의 유사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실질적 정책은 많이 달랐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오히려 중국 계의 혼혈로 여겨졌던 고구려족(맥족)은 말갈족(숙신, 읍루)과 친하거나 고구려가 말갈족을 이용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반면 백제(부여족이 세움)<삼국사기>를 따를 때, 말갈족(숙신족)에게 엄청 배타적이었다.

 

물론 기존의 사학계에서는 한반도의 말갈족을 예족(濊族)으로 명명했지만 나는 그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말갈(靺鞨)은 말갈이지, 무슨 예족(濊族)이겠는가!

 

, 부여족 왕조(남부여: 백제)는 자신들과 인종적으로 가까운 숙신(말갈)족에게 엄청 배타적이었다. 반면 오히려 중국계의 혼혈이라고 하는 고구려(맥족)는 말갈과 친하게 지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따를 때, 종족 상의 유사성이 있다고 하여, 더 친하다는 보증은 없다.

 

고고학계의 분석에 의하면; 고구려의 기와 중 어떤 양식은 중국의 북조스타일이다. 반면 백제의 기와는 중국의 남조 스타일이라고 한다. 또한 중국 고고학자 위존성의 짧은 논문에 의하면(오래 전에 나온 논문), 고구려 고분의 형식을 중국 고분들의 형식과 비교하기도 한 셈이다.

 

그렇다면 일단 고구려의 문화적 정체는 의심받기에 좋다. 그러나 그 고구려는 한()나라의 위성도시였던 낙랑을 무너뜨렸고, 수나라와 당나라 모두 전쟁에서 크게 패했다. , 고구려의 승리였다.

 

이점에 있어서 고구려는 충분히 자주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정체에 있어서는 뭔가 중국적이며, 사로국을 점령하여 신라 화 시킨 게 아닌지 궁금하다(필자의 페이스북 2019124일의 게시물과 비교).

 

여기서 사로가 신라화 된다는 뜻은 사로국(경주)의 문화적 정체가 중국화 됨을 뜻한다. 이 일을 실행한 국가가 고구려였을 가능성이 짙다.

 

뿐만 아니라 그 일 때문에 신라는 백제와도 원수지간이 되어야 했고, 마침내 일본과는 철천지 원수처럼 변해야 할 사태였다.

 

이상하게도 일본은 고구려한테는 별로 말 안 하고, 약한(힘 없는) 한반도의 신라만 죽으라고 미워한 이중성이 보인다. 차라리 고구려를 원망했어야지!

 

만주사(滿洲史)는 고구려사에서 멈춘 게 아니다! 발해, 전금(前金), 후금(後金), 만주제국(滿洲帝國)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

 

다시 말해 세계 제2차대전에서의 전후처리 문제와 한국전쟁 때문에 엉뚱하게도 사라진 제국이 만주다!

 

굳이 신생 독립국들이 필요했다면; 만주제국의 독립, 신장의 독립, 내몽골의 독립, 티벳의 독립, 한반도의 독립, 중화민국의 독립 등. 사태가 이와 같았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왠지 이 부분을 너무 간과한 듯하다! 만주제국이 독립하면 한반도는 자동적으로 통일된 채로 독립된다. 설령 한반도에 친일정부가 들어서든 아니면 친미정부가 들어서든 관계 없다!

 

일단 분단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라와의 연관이 깊었던 청()황실과 만주제국 그리고 만주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이신죠로 푸이를 생각할 때, 대동아공영권은 성공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

 

굳이 일본이 패전해야 했다면, 미군이 만주제국으로 들어가서 만주제국에 성조기 꽂고, 일정 기간의 미군정을 실행한 후, 만주제국을 복원해 주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고구려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신라(新羅) 아니, 사로국(斯盧國)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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